1930년대 조선학 운동과 실학 재발견

1930년대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이 신간회 해산 이후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며 다산 정약용 서거 100주년을 계기로 조선 후기 학문을 재평가하고 '실학'이라는 용어를 정립한 과정을 다룹니다.

1930년대, 한국사 연구의 흐름 속에서 '조선학 운동'이라는 중요한 민족주의 사학 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 이는 1920년대 후반 민족 유일당 운동의 일환으로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가 연대하여 결성되었던 신간회(新幹會)가 1931년 해산되면서 시작된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의 깊은 고민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사회주의자들이 농민 및 노동 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한 반면,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은 민족의 주체적인 미래를 위한 새로운 운동 방향을 모색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고민 속에서 조선학 운동이 구체화된 중요한 계기는 바로 1935년 다산 정약용 선생의 서거 100주년이었습니다. 다산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기념 사업의 일환으로 그의 방대한 저술들을 집대성하는 『여유당전서』 편찬 작업이 준비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다산의 저작들을 수집하고 깊이 있게 연구하는 작업이 활발히 진행되었습니다.

학자들이 『여유당전서』 편찬을 위해 다산 정약용의 학문을 재검토하는 과정에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조선은 성리학의 나라로 알려져 있었으나, 다산의 학풍이 일반적인 성리학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인지하게 된 것입니다. 다산의 학문적 계보를 추적하자 유형원, 이익 등 선대 학자들과 유수원,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같은 동시대의 다양한 학자들이 연결되었고, 더 나아가 이수광과 같은 선구적 인물들까지 발견되었습니다. 이들은 기존 성리학의 틀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독자적이고 주체적인 사유체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학자들의 연구를 통해 조선 후기 학문이 지닌 근대성과 주체성, 그리고 독자성이 실증적이고 고증적인 방법으로 재평가되었습니다. 학자들은 서구에서 유래한 근대성이 아닌, 우리 민족 내부에 이미 존재했던 새로운 시대적 흐름을 확인하며, 이 학문적 전통에 '조선학'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특히, 다산 정약용을 비롯한 이들 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추구했던 '사실에 입각하여 진리를 구하는(실사구시, 實事求是)' 태도를 바탕으로, 그들의 학문을 통합하여 '실학(實學)'이라는 용어를 정립하게 됩니다. 이는 조선 후기 학자들이 스스로를 실학자라고 칭하지 않았으며, '실학'이라는 용어는 1930년대 조선학 운동을 통해 후대에 명명되고 확립된 것임을 의미합니다.

조선학 운동에 참여한 대표적인 인물들은 조선 후기 학문과 실학의 재정립에 기여하면서도, 고대부터 이어져 온 민족 고유의 자주정신을 찾으려 했습니다. 위당 정인보는 우리 민족의 자주정신을 '얼'로 지칭하며 고대사 연구에 매진했고, 특히 양명학자로 '지행합일(知行合一)' 사상을 중시했습니다. 문일평은 고대사가 아닌 민중의 삶과 정신에 주목하여, 우리말과 글, 특히 훈민정음에 담긴 민족 정신을 '조선심'이라 명명했습니다. 한편, 안재홍은 신채호의 『조선상고사』를 연재하는 등 고대사 연구를 통해 민족 정신을 탐구했으며, 해방 이후에는 기존 민족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고 민족 내부의 모순과 갈등 해결을 강조하는 '신민족주의'를 제창하기도 했습니다.

조선학 운동을 포함한 1930년대 민족주의 사학은 민족 고유의 정체성과 정신을 찾고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긍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이들은 주로 고대사에서 민족의 자주성과 독자성을 발견하려 했으며, 민족을 유기적인 단일체로 인식했습니다. 하지만, 민족 내부의 계급적 갈등이나 모순보다는 단합과 민족의 특수성만을 강조하는 한계점도 지녔습니다. 안재홍의 신민족주의는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고 민족 내부의 갈등 해결을 통한 진정한 민족 통합을 모색하려 한 발전적인 시도였습니다.